본문 바로가기

리뷰/책리뷰

고요한 밤의 눈

고급의 사유. 장편의 호흡. 

6회 혼불문학상 수상


박주영 장편소설

『고요한 밤의 눈』

 


본래 내 직업은 조사하고, 생각한 뒤 쓰는 것이었다.

지난 1, 35개월만에 사직서를 썼는데(재직기간 중 7개월은 병원에 있었으니까 정확히는 210개월 일했다), 그런 직업으로부터 은퇴했다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였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힘들게 공부해서 그 직업을 가진 이유는 무엇보다 엄마와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 위해서였으니, 어쩌면 불순한 동기에서 출발한 벌인지도 몰랐다.

내가 수단이 되었다는 의미는 이를 테면 이런 것이었다. 나는 생각한 바를 쓰고, 관계기관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정책을 세우는 것이 원칙인데, 주제의 선정, 조사 과정과 결과의 해석에서 내 재량은 눈곱보다도 작았다. 어떤 땐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것이 빤한 주제를 맡기도 했다.

나는 점점 생각을 생각없이 하게 되었다. 생각을 말하기 어려워지자 아예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밤이 늦어 퇴근하면, 씻고 자기에 바빴고, 그마저도 생각의 회로가 도대체 멈추질 않아 몇 시간 동안 불면을 떨칠 수 있을 때까지 텔레비전을 멍하니 보았던 날도 많았다. 시시포스가 따로 없었다.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 것 같았다. 스스로 했던 생각과 글쓰기는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스스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직업적인 생각과 글쓰기는 너무도 달랐다.

내 폴더에 창작 소재를 담아 놓았던 ‘Geschichte(독일어로 이야기’)’ 폴더는 입사 이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남의 시나리오를 소설화하여 연재사이트 담당자에게 넘기는 것이 35개월 동안의 작업 전부였다.

나는 메말라갔다. 생각없이 사는 나날이 연속되었다. 그러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글을 쓰게 되는 동기의 원천은 대개 분노넘을 수 없는 벽이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건강은 그 사이 최악이 되었다. 재작년 9월에 수술을 한 후 거동이 불편했던 다리는 그 즘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안정적이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진 딸이 자랑거리였던 부모님에게 1년 간 쉬겠다고 선언했다. 그 중 6개월은 아무 생각없이 놀고, 나머지 6개월은 달라진 내가 생계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사실 메말라가던 내 모습을 속으로만 안타까워하시던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하셨다. ‘흔쾌히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생각이란 걸 하고 싶어졌다. 우선 책을 읽으려니 쉽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책인데도, 내용이 긴 글을 읽으려니 근육이 뻣뻣해졌다. 어떻게 책을 선택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무작정 상을 탄 책을 골랐다. 적어도 영양가(?)는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턱없이  『고요한 밤의 눈』을 만났다.





이 책은 스파이에 관한 얘기다. 사회계급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며, 음모 또는 도시전설과 희망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감동이 사그라지기 전에 리뷰를 적고 싶어 한 번만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고 싶고, 이 책의 내용이 가물가물해질 때쯤 다시 또 읽고 싶다.

처음부터 60%까지는 조금 지루하다. 음모가 빨리 드러나지 않아 답답한 기분이 두세 번 들었다. 그 다음 20%는 점과 점을 연결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20%는 선과 면이 된 등장인물들을 그리며 미칠 듯이 재미있게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고급의 사유를 했다는 사실에서 뿌듯했고, 장편의 호흡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고등학생일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이 등장했을 때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로 재해석되어 소름이 돋았다. , 거의 마지막 Z패자의 서부분에 이르러서는 마치 지은이가 Z이고, 이 이야기는 어딘가 실재했던 일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더 나아가 그 분이 잘못되고부터라는 부분에선 벌써 희미해져가는 그 날의 비통함이 되살아났고, D가 자신을 외장하드라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어딘가 묻혀있을 진실, 그러니까 사라진 D의 언니와 X의 기억이 무엇일지 상상하게 되었다.

아직 읽는 능력의 저하, 생각 세포의 비활성화, 쓰는 기술에 낀 녹 때문에 리뷰가 생각한 대로 써지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종국적으로 기억을 잃은 X처럼 내 생각을 다시 쓰고싶어졌다.